폭풍이 지나면 고요가 오듯이

요즈음 "과시가 일상의 표준"이 된 듯. 사람들이 특별한 날이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적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중심 사회임을 강조하듯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사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게 습관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단순한 토스트와 커피도 "오늘의 감각적인 브런치"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운동 후 땀에 젖은 모습도 "오늘도 자기 관리 완료"라는 메시지로 공유하는 등 하루 종일 SNS에 자신의 소비, 이동, 만남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게 기본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비와 생활 방식에 있어서 차를 고를 때 "내가 어떤 차를 타는가"가 곧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여, 성능보다 브랜드와 디자인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카페에 가도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또 일상 공간인 집 내부의 인테리어도 실제 생활 편의보다 사진 찍기 좋은 공간으로 꾸미는 게 일반적이거나, 손님을 초대할 때는 살기 편한 공간보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집이 오히려 칭찬받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에서, 업무 성과 자체보다 바쁜 척하거나 자신의 중요성을 과시하는 모습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생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도 고급스러운 음식 사진을 SNS에 공유하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자랑하는 행위가 마치 당연한 문화처럼 자리 잡은 듯합니다

 

, 현대 사회에서는 겸손함이나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드문 현상으로 인식되는 반면,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는 '과시'가 일상의 기본값이 되어 버린 듯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진정성보다는 겉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문화가 점차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사회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고고학적 발굴 유적과 연구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듯,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 온 본능적 욕구의 발현임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시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화려한 꼬리를 펼치는 공작새부터 아름다운 꽃을 피워 유혹하는 식물들까지, 자연계 전체가 과시에 목을 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대체 왜 우리는, 그리고 생명체들은 이토록 과시에 진심인 것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고 신뢰할 만한 참고 지표로 알려진 딜로이트의 지표를 종합한 한 언론보도의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는 '생존'이 아니라 '인정'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높은 가계부채와 재무적 불안 속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소비와 과시 소비가 유지되는 이유는, 무너진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소비'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 한국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가계부채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소식은, 우리 안의 이 본능이 때로는 위험한 선을 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시적 소비 현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수만 년 전 원시 인류도 사냥으로 얻은 맹수의 이빨로 목걸이를 만들고, 거대한 뿔을 장신구로 삼아 생존 능력, 사회적 지위, 권력을 드러냈습니다. 당시에는 물리적 힘이나 자원 보유 여부가 생존 전략이었다면, 현대인은 명품 소유나 SNS를 통한 화려한 생활 공개라는 방식으로 진화했을 뿐 인간의 근본적 욕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과시란 집단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경쟁 우위를 점하려는 본능적 행동으로, 시대와 문화에 따라 표현 수단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대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같은 거대 석조물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힘을 시각적으로 과시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이 나무나 흙이 아닌 다루기 힘든 작업인 석조물을 굳이 고집한 이유, 즉 자신의 이름과 권력이 세대를 넘어 수천 년 동안 기억되기를 바랐던 인간의 '존재 과시욕'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우주 전체 역사를 1년 달력으로 압축하여 설명한 '우주력'에 따르면, 인류 문명의 역사는 1초에도 미치지 못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수명이 우주적인 시간 척도에서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석조물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과 권력이 세대를 넘어 수천 년 동안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나의 행복이 '남의 시선과 박수'에 달려 있다면, 내 행복의 주권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 달려 있다는 셈입니다. 관객이 사라지거나 비난을 보낼 때 그 행복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 따라서 과시 욕구는 본능적이지만, "왜 과시하려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자기 성찰과 마음 챙김으로 중심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삶은 늘 갈증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과시 욕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힘, 그리고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Posted by neoisme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그거지” “그놈이 그놈이야.”

 

그게 그거지는 두 개의 사물, 상황 등이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사소한 선택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현으로 실용적이고 유연한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면 무료 앱이랑 유료 앱, 기능 차이 거의 없어. 그게 그거야.”

 

반면에 그놈이 그놈이야라는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실상은 똑같거나 별 차이 없는 대상(특히 사람)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기대했는데 또 실망했어.” “겉과 속이 다르네.” 등의 실망과 냉소적 표현입니다. 특히 정치, 사회 이슈, 인간관계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며칠 전 매스컴을 통해 한 원로 여배우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뉴스를 보며, 몇 달 전 방영되었던 한 TV 토크쇼가 떠올랐습니다. 근현대사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그 프로그램에서, 전설적인 미모로 기억되는 한 여배우가 했다는 발언이 유독 인상 깊었습니다.

 

네 번의 결혼을 겪은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잘생긴 놈이나 똑똑한 놈이나, 남자는 다 똑같다.”

 

1960~70년대는 개인의 개성이나 선택보다 남성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문화적 규범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남성에게는 남자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우는 모습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감정을 억누르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살아가야 한다는 규범이 강요되었습니다. 식사할 때 숟가락에 한 번 뜬 밥의 양이 많을지라도 한 번에 먹어야 하며, 두 번 나누어 먹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하거나, 술을 잘 먹고, 많이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등을 사회적 미덕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남성이 주방에 들어가는 것은 남자다움을 훼손한다라는 편견으로 인해 금기시되었으며, 가정에서는 권위적인 가장 역할을, 직장에서는 묵묵한 순종을 요구받았습니다. 이러한 규범은 남성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자율성까지 제약하는 구조로 작동했습니다.

 

이런 가부장적 사회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성에 대한 반복된 기대와 좌절은 결국 "그놈이 놈이다"라는 냉소적 언어를 낳았습니다. 이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환멸과 함께, 모든 남성이 동일한 틀에 갇혀 있다는 허무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남성에게 요구된 "강인함""권위적 가장 역할"은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빈번히 무너졌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남성성에 대한 이상적 기대를 포기하며 모든 남성을 획일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탄생한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냉소적·체념적 사고는 최근에 이르러서도 이어져, 요즘 청년층의 대인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201420·30대의 75%가 타인을 신뢰한다고 응답했던 것이 2023년에는 절반 수준인 약 54%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적 고립과 불안이 심화하면서 더 가속화된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데이터는 단순한 개인적 회의감을 넘어, 구조적 불신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신뢰 붕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정하지 않은 경쟁, 노력에 비해 보상이 따르지 않는 경험, 말과 행동이 다른 조직과 개인에 대한 반복된 실망 등이 누적된 결과라고 합니다. 여기에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은 타인을 협력의 대상이 아닌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게 만든 결과 사람은 믿어볼 가치가 있다라는 전제는 사라지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개인이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완전 신뢰와 완전 불신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맡기기보다 작은 약속의 이행 여부를 통해 신뢰를 점진적으로 쌓고, 말보다 반복되는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인을 대할 때 '좋은 사람인가'를 따지기보다, 나 스스로가 상대방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예측 가능한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또한 모든 관계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계의 영역을 나누어 부분적 신뢰를 허용하면 실망의 크기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관계를 영역별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돈거래는 하지 않지만 대화는 잘 통하는 친구’, ‘업무 능력은 신뢰하지만, 사생활은 공유하지 않는 동료처럼 부분적 신뢰를 허용하면 실망의 크기를 줄이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가 붕괴한 사회 속에서도 최소한 나 자신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 일입니다. 약속을 지키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작은 정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온전한 신뢰가 깃들었던 시대는 다시 찾아오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냉소의 늪에 완전히 잠기지 않을 선택지는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뢰란 모든 사람을 다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도 괜찮은 선을 정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다시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neoisme

 

4천 년 전인 기원전 176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인류가 사회 질서를 위해 만든 최초의 체계적인 법령이라 합니다. 이 법전의 상징적인 정신은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원칙이었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현재 우리가 따르는 법은 이처럼 고대부터 쌓여 온 지혜와 진화의 최종 결과물입니다. 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약속한 규범이며, 이 규칙을 어기면 벌칙(형벌)이 따릅니다. 이 벌칙을 집행하고 사람들을 교화시키려는 곳이 바로 교도소나 구치소 같은 교정 시설입니다.

 

형벌의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국가마다 그 방식은 매우 다릅니다. 예를 들어, 2024년 싱가포르에서는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에게 징역 176개월과 함께 태형 20대가 선고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싱가포르의 태형은 단순히 때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길이 약 1.5m, 두께 최대 1.27cm의 대나무 줄기로 특수 제작된 라탄채찍으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엉덩이 아랫부분을 시속 약 160km의 속도로 내려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대만으로도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길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범죄를 강력하게 억제하려는 목적 아래, 여전히 가혹한 방식의 형벌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교도소의 공식적인 목적은 수감자를 벌하고, 잘못을 깨닫게 하여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슬픈 역설이 발견되곤 합니다.

 

일부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교도소를 '학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이곳에서 새로운 범죄 수법을 배우거나, 다른 범죄자들과 인맥을 쌓아 오히려 범죄를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는 구조적 문제를 풍자하는 표현입니다.

 

, 전과 횟수인 '전과 1, 2...'을 비유적으로 '별 하나, 별 둘'처럼 부르며 자랑처럼 말하는 은어도 있습니다. 이는 교도소가 교화 기관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교도소나 구치소 같은 교정 시설이 지도나 내비게이션에 잘 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시설들이 국가 중요시설로 분류되어 보안과 안전을 위해 위치 공개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형제도는 폐지 또는 사실상 집행 중단의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범죄자 증가와 엄벌주의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교도소의 과밀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미래의 형벌에 대한 상상도 등장했습니다.

 

1993년 영화 데몰리션 맨이나 2002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중범죄자를 극저온(-196액체질소)으로 얼려 생물학적 시간을 정지시키는 냉동 감옥이 그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수용 비용 절감, 탈옥 불가능, 재범 방지 등의 장점이 있어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해동 후 살아난 사례가 단 하나도 없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기술로 평가됩니다.

 

2024년 예멘 출신 과학 커뮤니케이터 Hashem Al-Ghaili가 제안한 아이디어로 미래 감옥인 ‘Cognify’(가상 감옥)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시스템은 VR·-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활용해 단 몇 분 만에 수십 년의 감각적 형벌을 경험하게 하고 피해자 관점 체험, 후회·반성 시나리오를 AI가 지속 제공하며 형기 종료 후 즉시 사회 복귀라는 개념적 모델이라고 합니다.

 

현실과 법의 경계선상에서는 새로운 문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등장했던 디지털 교도소'는 법적 절차 없이 강력범죄자의 신상 정보를 무단으로 공개한 불법 사적제재 사이트였습니다.

 

이러한 사이트는 온라인 공간에서 누구나 심판관이 되어 타인을 낙인찍고 처벌할 수 있는 기술 시대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국가가 가진 형벌권을 침해하고 법치주의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집니다.

 

법은 완벽하지 않으며,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눈에는 눈'의 원칙에서부터 현재의 복잡한 교정 시스템, 그리고 미래의 윤리적 논쟁까지, 법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법과 제도 개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 우리의 법 시스템은 시대를 더욱 정확하게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Posted by neois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