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지나면 고요가 오듯이


요즈음 권투경기보다는 UFC, Strikeforce 등 종합격투기를 즐겨 보는데 그것은 세계 최강의 파이터들이 펼치는 화끈한 경기를 관람하면서 느낄 수 있는 엄청난 긴장감과 압박감 등 재미의 요소를 부각해주기 때문입니다.이중 UFC는 프라이드 등을 인수한이래 상승가도를 달리면서 단숨에 세계 제1의 격투기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프로복서 출신이며 현재 UFC 대표인 데이나 화이트가 평소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어느날 그가 입은 티셔츠에 새겨진 낯익은 복서 사진을 보았습니다. 바로 마이크 타이슨이었습니다.

사실 타이슨은 종목을 막론하고 수많은 격투가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히지만 일반팬들에게는 성폭행사건과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반칙으로 실격패 당한 기억 등으로 그렇게 좋지 않은 인상입니다.

그러나 데이나 화이트가 타이슨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라면 무언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타이슨의 아마추어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의 경기 동영상 등 보도자료 등을 어렵게 구하여 볼 수 있었습니다.

타이슨의 예전경기를 본 이후 저는 타이슨이 핵이빨이라는 불명예적인 별명과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기에 열광했을 뿐 아니라 타이슨이야 말로 정말 복싱역사상 최고의 복서라고 생각하면서 타이슨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생활이 드러나고 매스컴이나 타는 퇴물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욕해도 당시 그의 경기를 보며 열광했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아 지켜보며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2011613(한국시각)에 타이슨(45)이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입성했다는 것이지요. 그동안 잦은 폭행사건과 기행, 이혼과 마약중독 등으로 점철된 인생으로 복서의 평판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복싱 명예의 전당에 오를 것이 힘들것이라는 논란과 예상을 뛰어넘고 복서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1.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 이력

 ㅇ본명 Michael Gerard Tyson

 ㅇ출생 1966630(미국)

 ㅇ신체 178cm, 99kg

 ㅇ데뷔 1985년 프로 전향

 ㅇ별명 핵주먹


2. 타이슨의 가정환경

타이슨은 1966630일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테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지미 타이슨이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형, 누나와 타이슨은 가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리고 두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려. 타이슨의 어머니인 로나는 스스로 자식들을 부양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간간히 나오는 복지단체의 보조금에 의존하며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1982년 여름, 타이슨이 16살때 그의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여 큰 아픔을 겪게됩니다.


3. 타이슨의 복싱 입문

타이슨은 이른바 문제아로 성장했습니다.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모아 교화시키는 타이론스쿨에 들어갔지만, 타이슨은 폭력적인 성향을 고치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엘름우드 소년원으로 보내진 타이슨은 그곳에서 바비 스튜어트를 만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싱코치를 맡고 있던 바비 스튜어트가 타이슨이 복싱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아마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타이슨은 소년원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튜어트는 타이슨을 전설적인 복싱 트레이너인 커스 다마토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그 당시 타이슨은 13세였고, 순수한 근육으로만 뭉쳐진 130파운드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커스 다마토는 타이슨을 스튜어트와 직접 시합을 붙여 평가했다고 합니다. 스파링 에서 타이슨의 파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스튜어트는 오랜 선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만큼, 타이슨의 안면에 수많은 정타를 날려 타이슨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타이슨은 세컨드가 만류했음에도 들은 척도 안하고 끝까지 덤벼들었다고 합니다. 타이슨의 인생을 뒤바꾼 이 스파링 뒤에 커스는 스튜어트에게 타이슨은 미래의 헤비급 챔피언이 될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마토는 타이슨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14살 되던 해에 정식으로 그를 입양했습니다.


4. 타이슨 최연소 세계챔피언

다마토를 아버지처럼 따른 타이슨은 착실히 복싱 훈련을 한 끝에 19세에 프로로 데뷔하게 됩니다. 데뷔 후 승승장구하던 타이슨은 1986년 트레버 버빅을 KO시켜 세계권투평의회(WBC)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듬해에는 세계권투협회(WBA)·국제권투연맹(IBF) 타이틀을 잇따라 거머쥐며 3개 단체 통합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가 WBC 챔피언에 올랐을 당시 나이는 204개월22. 역대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 기록이었습니다.


5. 마이크 타이슨 프로 전적(54504)

1986. 11 WBC 헤비급챔피언 등극최연소 헤비급 챔피언204개월 22)

1987. 03 WBA헤비급챔피언

1987. 08 IBF헤비급챔피언

1990. 02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통합타이틀 방어실패(KO)

1991. 07 18세 흑인소녀 강간 혐의로 기소

1992. 03 징역 36월의 실형 선고

1995. 03 가석방

1996. 03 WBC 타이틀 차지해 6년만에 챔피언 등극

1996. 09 WBA 타이틀 획득

1996. 11 에반더 홀리필드에 져 WBA 타이틀 방어 실패(TKO)

1997. 06 홀리필드와의 경기 도중 귀를 물어 뜯어 선수자격정지

2002. 06 레녹스 루이스와의 경기에서 패배(KO)

2003. 08 법원에 파산 신청

2004. 07 대니 윌리엄스전에서 패배(KO)

2005. 06 케빈 맥브라이드전에서 패배(TKO)후 은퇴 선언


6. 타이슨의 3번의 결혼

ㅇ첫번째 결혼


타이슨은 주위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돈만 밝힌다는 모델출신의 미모의 여성 로빈 기븐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여
1988년 결혼하였지만 하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기븐스에게 이혼 소송을 당해 이혼하였습니다. 이 때 기븐스는 이혼법에서 유리하게 적용되는 캘리포니아에서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타이슨의 재산중 4000만 달러를 챙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두번째 결혼

 


타이슨이 미스 불랙아메리카 데지레 워싱턴양의 강간죄로 인디애나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 만난 동갑내기인 조지타운대학병원 레지던트 모니카 터너와 옥중결혼식을 올렸다는 보도도 나왔으며, 공식적으로는 1997년 결혼했던 터너는 5년후인 20031"타이슨이 결혼한 뒤에도 여러차례 부정(不貞)을 저질렀다"며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이혼하였습니다.

세번째 결혼


201166(현지시간) 마이크 타이슨(43)이 그의 여자친구인 라키아 스파이서와 라스베가스에서 결혼 허가증을 받아 당일 저녁 라스베가스 힐튼호텔에 위치한 '라벨라'웨딩교회에서 세번재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타이슨과 스파이서는 지난 이들의 갑작스런 결혼은 2주 전 타이슨의 딸이 헬스클럽에서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 스파이서가 슬픔에 잠겨 있는 타이슨을 위로하며 사랑을 키웠다고 전해졌습니다
.

7. 타이슨의 주변 관계 인물

바비 스튜어트(Bobby Stewart)

 


라이트급 '골든 글러브' 챔피언 영예를 안았던 복싱 선수출신의 코치 이었습니다. 미들급 프로선수로 전향한 후 십 여차례 시합에 참가한 후 두번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하였으나 세계챔피언이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함을 깨닫고 지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름우드 소년원 복싱 코치시절 타이슨의 자질을 발견하여 커스 다마토에게 소개함으로써 타이슨이 복싱 전설이 되게끔 물꼬를 터준 첫번째 은인이라 생각합니다.


커스 다마토(Cus D'Amato)

 


1908117일에 미국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나 1985년 11월 4일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타이슨을 깨지기 쉬운 도자기에 비유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넘치는 사랑으로 가르친 타이슨의 진정한 아버지이었습니다. 다마토가 네살때 어머니를 잃고, 일곱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죽는 험난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열두 살 때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기에 애초 제대로 선수 생활을 하기엔 쉽지 않은 몸이었던 것을 보면 전형적인 복싱 코치의 코스를 밟아 온 사람은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플로이드 페터슨과 호세 토레스라는 세계 챔피언들을 길러냈고, 무하마드 알리가 직접 찾아와 같이 일해 보자고 간청했을 정도로 복싱계에서 전설로 인정받던 이 위대한 노인이었습니다.

케빈 루니(Kevin Rooney)


195654일 미국 뉴욕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전직 웰터급 프로복서 출신으로서 1985년 부터 커스 다마토와 계약으로 타이슨의 트레이너로서 활약하였습니다. 링에서의 루니의 행동에서 타이슨에 대한 애정이 애사롭지 않음을 알수 있었었지만 불화로 인하여 1988년 타이슨이 해고 하였습니다. 이후 타이슨의 권투 기술은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타이슨의 첫 손실이 루니를 해고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루니는 계약에 의해 타이슨의 수입중 10%를 받기로 돼있었으나 88년 타이슨이 이를 파기, 부당하게 자신을 해고했다며 49백달러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199610월 승소하였습니다

돈 킹(Don King)

 


얼핏보기에 후덕한 몸매와 인자하게 웃는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주지만 지난 40 여년간 세계 프로 권투 흥행계를 좌지우지하면서 각종 비리와 스캔들로 프로권투를 망가뜨린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31820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열살 무렵 철강회사에 근무하던 그의 아버지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 후 그의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어려서부터 험한 도박판에 몸담게 되어 젊은 시절은 많은 범법행위로 장식되었습니다. 결국 폭행치사죄로 감옥에서 4년을 보내게 되고 이 기간 동안 독서를 통하여 부족했던 지식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의 권투선수로서의 경력은 고등학교 시절 아마추어 복서로서 잠깐 활동도 했을 뿐 곧 선수로서의 생활은 마감했습니다.

1974년 자이레의 킨샤사에서 열였던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경기는 당시 자이레의 독재자 모부투에게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만한 국제적인 빅 이벤트를 제안하고 모부투로부터 대회 경비와 상금까지도 지원을 받아 흥행에 성공시켰습니다. 그 다음해 인 1975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의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 역시 자이레의 모부투와 상황이 비슷하였던 필리핀의 독재자인 마르코스에 제안하여 성사되었던 경기이었습니다



8. 타이슨의 좋은 점

첫째, 해비급선수치고는 크지않는 체구로서 약관 20세에 세계헤비급타이틀을 석권하여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전성기 시절만 놓고 보면 복싱의 전설 중 최고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타고난 복서의 몸에다가 펀치력, 유연성, 스피드, 순발력, 몸놀림은 혹독한 연습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것입니다.

셋째, 선수입장시 화려한 가운을 입지 않고 대부분 맨몸으로 입장하는 모습과 링아나운서의 선수 소개시에도 자신의 손을 번쩍 치켜들거나 별다른 액션을 취한지 않고 항상 무표정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그로부터 진정한 전사임을 느꼈습니다.

넷째, 경기 종료후에는 항상 상대방 선수에게 먼저 다가가 포옹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섯째, 외모와는 달리 약한 모습을 보이며 눈물을 글썽일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비둘기를 좋아하며 비둘기가 편안한 느낌과 좋은 감정을 준다는 그의 말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납니다.

끝으로, 비록 그가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났었지만 뉴요커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9.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타이슨은 원래 굉장히 내성적이며 불안정한 성격에 누군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받는 걸로 여기는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 찬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고, 본격적인 인생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성공을 맛보았으며, 그로 인해 뒤바뀐 자신의 인생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해 허둥댔다는 게 달라 문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강간 혐의, 홀리필드 상해사건 등 그의 사연은 독특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타이슨이 겪은 것과 같은 차원의 불행을 경험한 이는 없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 세계페더급 챔피언 배리 맥기건Barry McGuigan 의 말입니다.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그처럼 되었을 겁니다.”

Posted by neoisme